해의 역습 (2000)
아침에 이모 심부름하러 집을 나섰는데 어디서 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데 아무도 없다. 일단 쌩까구 그냥 가던 길을 갔다.
“야 안녕~”
다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잘 들어보니 머리 위에서 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점점 힘을 더해가는 햇살만이 머리위를 비춘다. 그래서 잠시 해를 바라보았다.
“갈구지마”
해가 나에게 말했다. 갈구지마… 이 말은 순간적으로 나를 다른 기억의 세계로 보내주었다.
갈구지마(渴丘之馬)-목마른 언덕의 말-는 논어(論語)의 안연편(顔淵篇)에 나오는 고사로 공자(孔子)가 특히 아끼던 제자인 안회(顔回)에게 욕심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해준 말이다.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回也 聞一知十)는 제자로 공자보다 일찍 죽어 공자가 많이 슬퍼하였다. 대충 내용을 설명하자면 춘추오패(春秋五覇)중 하나인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여러 제후들을 모아 초(楚)나라를 공략할 때의 일이다.(B.C. 606년) 초나라의 장수인 진구(盡久)는 초나라의 강화의견에 반대하고 독자적으로 제 연합군을 공격했다. 하지만 관중(管仲)의 굴아진(屈我陣)에 대패하였다. 굴아진은 관중이 관포지교(管鮑之交)라 일컬어지는 친구 포숙아(鮑叔牙)와 함께 고안해 낸 진으로 진의 모양을 굽어지게 해서 그 가장 안쪽에 자신을 위치하게 하는 전술로 상대가 그 진을 뚫는동안 긴 끈 모양으로 늘어져 포위 공격하기 쉽게 만드는 진이다. 결국 대부분의 군대를 잃고 초나라로 돌아갈수도 없는 형편이 된 진구는 장강(長江) 상류의 성원(聖圓)지방까지 도망갔다. 이 지역에는 갈구(渴丘)라는 언덕이 있는데 이곳은 꽤 긴 언덕이 계속되는데도 샘이 없어서 아주 많은 물을 가져가지 않으면 넘기 힘든 곳이었다. 추격하는 군대를 뿌리치기 위해 단숨에 이곳에 다다른 진구는 준비된 물도 없이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 계속 가도 샘이 없어 진구는 갈증에 거의 미치기 직전까지 갔다. 힘이 빠져 가는데 길에 누군가가 흘리고 간 듯한 작은 물병이 떨어져 있었다. 진구가 말에서 내려 물병을 들어보니 물은 가득차 있었다. 진구가 정신없이 물을 반쯤 마셨을 때 말이 히히힝거렸다. 그도 그럴것이 말 역시도 계속 달렸기 때문에 목이 많이 마를 것이다. 그런데 진구는 말에게 물을 주는게 아까워 자신이 모두 마셔버렸다. 그리고 말을 몰고 다시 길을 가는데 중간쯤 가서 말은 갈증으로 쓰러져 죽어버렸다. 결국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진구는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었다. 진구는 그곳에서 죽게 되었다. 지나친 욕심은 결국 자신도 해친다는 교훈이다. 그 후 제나라는 초나라와 소릉(召陵)에서 강화를 맺었고 환공 35년(B.C. 651년) 여름에는 여러 제후들을 규구(葵丘)에 모아 회맹(會盟)하기에 이르렀다.
어쨌든 해가 나에게 말을 건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난 적잖이 놀랐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호들갑을 떨 순 없었다.
난 의연하게 별로 놀랍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뭐야 새삼스럽게 인사는…어차피 매일 보면서”
“난 어제 뜬 해랑 달라.”
“너는 인생이 구라냐? 너 어제 그놈이자나.”
나는 이녀석의 모습에서 어제 그놈이랑 다른 점을 찾으려 했지만 전혀 없었다. 그렇다 전혀…
“어제까지 일하던 애는 지금 휴가 갔어.”
“뭐…”
“그녀석 이번엔 꼭 쉬겠다구 해서 내가 대타뛰는 거야.”
“……”
“이번엔 안드로메다에서 한 일주일 푹 쉬다 온다던데.”
“그래?”
“난 원래 이녀석 앞 타임인데 연속해서 뛰는 거라 힘들어 죽겠다.”
“응…”
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의 차이가 있었다. 해 하나가 지구 주위를 뺑뺑 도는게 아니었던 것이다. 하루에 8시간씩 3타임으로 나뉘어 있는 엄밀한 의미에선 파트타이머였다. 아무도 해에 신경을 안쓸때 또 아무도 안 쳐다볼때 잽싸게 교대한다구 한다. 그래서 미국에 뜨는 해랑 우리나라에 뜨는 해는 정확히 말하자면 딴 놈이었다. 오늘 뜬 놈은 미국에 뜨는 놈인데 대타로 우리나라쪽도 뛰고 있는 것이었다.
“야~ 너 미국쪽 전문인데 우리나라 말도 할 줄 아네…”
“그래도 우리는 전문가 집단인데 자기쪽 말만 배우면 쓰나… 그리고 솔직히 밤엔 별로 할일도 없어서 책도 읽고 하니깐 그러면서 배우는 거지.”
“하긴 한두해 일하는 것두 아닌데 배우기 싫어도 배워지겠다.”
“그렇지 뭐…”
“근데 새천년에 대한 소감이 어때?”
“짜식 어리긴…”
“뭐라구?”
나는 불쾌한 빛을 말투에 굳이 숨기지 않았다.
“짜식 삐졌냐? 난 새천년 이런건 별루 의미없어.”
“그래두 니네가 가장 주목받는 때잖아. 인기 연예인 뺨치게.”
“야 내 나이를 생각해 봐라. 천년이 무슨 대수겠냐?”
“그렇구나.”
음 그럴만두 하다. 예수님 태어나기 아니 인간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그들이니깐 뭐 천년에 의미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근데 나랑 얘기하고 있어도 될 정도로 한가해?”
내가 새끼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물었다.
“난 6억 4천 5백 2십 8만 2천 6백 7십 1가지 곳을 보면서 그중에 4만 9천 백 3십 5곳에서 얘기할 수 있어.”
“F-14전투기가 24의 목표물을 동시에 추적하면서 그중 6개에 피닉스 미사일을 발사 할 수 있는 거랑 비슷하구나.”
“그런샘이지.”
어쨌든 난 그 4만 9천 백 3십 5곳중 하나가 이곳이라는 사실이 신기할 다름이었다.
“그런데 왜 내가 말을 걸었을 때 안놀라는 척 하는 거지?”
날카로운 햇살을 내눈에 쏘아대며 해가 물었다.
“응…”
난 당황되어 바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해가 내 감정을 읽고 있다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못된다. 특히 해와 대화하고 있을때는 더욱.
“내가 말 걸었을 때 꽤나 놀랬을 텐데.”
해가 다시 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더 이상 거짓말을 하고 있을순 없었다. 그랬다간 어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양이 여지껏 지구를 먹여살린 그 막대한 에너지의 일부만이라도 사용하여 내게 울트라 메가톤급 광선을 쏠지도 모르고 아님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차고 나는 해를 쫓은 인간으로 두고두고 욕을 먹을게 틀림없었다.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해 져서 겠지.”
난 경호와 같이 수련한 순간 얼굴 표정 바꾸기(통칭 표정관리)를 사용하여 진지하게 말했다.
“감정을 숨긴다… 확실히 요즘의 사람들은 그런거 같아.”
구름이 잠시 해를 가려서 내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고 지나갔다. 해가 다시 말을 이었다.
“2000년 전에만 해도 내가 말을 걸면 모두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왜 그리 자신을 숨기려고만 하지?”
“마음을 여는 게 두려워서 일꺼야. 난 내가 먼저 맘을 여는 게 두려워. 내가 먼저 마음을 열면 어김없어 상처를 입게 되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바람이 라이타의 불꽃을 계속 괴롭혀서 여러 번만에 겨우 붙일 수 있었다.
“그래서 상대방이 먼저 맘을 열기를 기다리는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난 상대방이 먼저 맘을 열면 잘 받아주는 편이거든. 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났는지도 모르지. 먼저 맘을 열면 상처받고 남이 먼저 열기를 기다려야 하는 운명을 갖고…”
“그런 식으로는 빨리 친해질 수 없잖아.”
“빨리 친해지는 걸 바라진 않아. 그런 우정은 멀어질때도 빠르기 마련이니까. 빨리 익은 쇠가 빨리 식는 법이거든.”
“그런데 요즘은 왜 그리 서두르지?”
태양이 또 나에 대해 잘 아는척을 했지만 아까처럼 기분 나쁘진 않았다. 대화 상대가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는 건 차라리 편한 일이었다.
“음 그래. 최근엔 서두른 감이 있지. 시간이 없어서 일꺼야. 새 친구들에게 모처럼 맘을 열었는데 그들은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고 문만 바라보고 있으니. 그들이 내가 맘의 문을 열었을 때 최대한 그 안을 들여다 보고 나의 일부를 가져가길 바랬어. 언제 다시 닫힐 지도 모르고 또 곧 긴 여행을 떠나야 하니까. 난 냉정한 사람이야. 엷은 우정도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그들과의 우정이 깊어지길 그래서 힘든 여행에서도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길 바란거지.”
“서둘러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거 같은데?”
“그래. 하지만 억지나 인위는 없었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조바심이 난거지. 내 손으로는 내 안의 어떤 것도 꺼낼 수 없어. 그게 나란 인간이야. 상대가 묻지 않은 건 말하지 않지만 상대가 궁금해하면 필요 이상으로 자세히 말해 주지.”
단숨에 많은 이야기를 해서 목이 탓다. 시원한 아이스티나 맥주가 생각났지만 그걸 지금 구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냥 참았다. 해에게 저 목이 말라서 좀 있다 보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서로에 대해 많이 안다고 친한 건 아니잖아?”
해가 다시 물어왔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많이 아는 게 중요한 건 아니야. 하지만 누굴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 내부로 접근하고 싶은 욕구가 아닐까? 사람이 친해지는 건 암모나이트 같은 거 같아. 기억하고 있나, 암모나이트?”
“음… 조금 오래된 기억이라 또렷이 생각나지는 않군. 달팽이 껍질 같이 생긴 걸 말하는 거지?”
“맞아.”
난 해도 또렷이 기억할 수 없는 것을 학교에서 꼭 당연히 기억해야 하는 것인 양 가르치는 아이러니를 잠시 생각하다 다시 말을 이었다.
“첨부터 그 사람 자체를 알 수는 없어. 안다고 믿어도 오해일 뿐이지. 그 사람 주변을 보며 조금씩 알아 가는 거야. 그 사람이 좋아하는 책, 즐겨 입는 옷, 자주 듣는 음악 뭐 이런 걸 알아가면서 그 사람의 내부까지 알아가지. 그런 것들에는 그 사람이 조금은 묻어 있으니까.”
“그게 암모나이트와 무슨 상관이지?”
“암모나이트 껍질 같은 거야. 가장 바깥쪽 껍질부터 중심으로 조금씩 그것도 뺑 돌아가며 접근하는 거지. 이걸 무시하고 직선으로 간다 해도 그 사람을 바로 알기는 불가능해. 사람은 진실을 말하기 보단 가장 진실이길 바라는 걸 말하기 마련이니까.”
“그 사람이 직접 말하는 자신조차도 거짓이 섞인다는 건가?”
“변명 같은 거지.”
“음 그럼 네 새 친구들은 암모나이트 껍질을 어느 정도 돌았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나의 조각이 아주 적다는 건 알 수 있어.”
“너의 조각?”
“암모나이트와는 다른 비유지만 사람을 알아 가는 건 그 사람의 조각을 모으는 거야. 작은 조각을 모두 모으면 모자이크처럼 그 사람이 되는 거지. 어차피 조각을 모두 모으기란 불가능 한 거고 얼마나 많이 모으냐야. 굳이 꼭 많이 모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적은 조각들은 오해를 낳기도 하고 한 곳에만 모인 조각들은 그 사람의 한 부분만을 보게 하기도 하지. 조각이 메우지 못한 빈 공간들은 추측과 오해로 들어차게 되니까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작은 이해와 큰 오해인 셈이야. 그래도 어느정도 조각을 모으면 그 사람의 윤곽정도는 알아 볼 수 있어. 물론 어느 정도의 조각을 모아야 하는 가는 조각이 되는 사람도 그걸 모으는 사람도 개인차가 있지만.”
“넌 어느 쪽이지? 조각이건 수집가건…”
“조각으로써의 나는 그리 윤곽이 매끄러운 편은 아니야. 조각이 어느 정도 모이기 전엔 쉽게 알아보기 힘든 타입일 꺼야. 음 그리고 수집가로써의 능력은 그리 나쁘진 않은 거 같아. 비교적 적은 조각으로도 윤곽을 잡아 가니까. 뭐 남보다 딱히 뛰어난 것도 아니고.”
언제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의 다른 면을 보고 놀라는 나로써는 나의 능력에 대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안다는 사람들도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내 윤곽이 매끄럽지 못하단 것은 나에 대한 숫한 사람들의 오해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자세히 내게 말해주는 걸 보니 나에겐 확실히 맘을 연 것 같은데.”
“네가 해의 비밀에 대해 얘기해 주어서 내 맘도 열린 거지. 내가 말했듯 난 상대가 맘을 열었을 때 꽤 잘 받아주니까.”
“그래 그럼 하나 더 묻지.”
해는 이미 내 머리위로 꼭대기까지 올라가 있었다. 난 그래서 굳이 해를 쳐다보며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건 눈부실뿐더러 지금처럼 머리 위에 있을 때는 목에 심각한 부담을 준다. 그래서 그냥 편하게 화단이나 지나가는 자동차 이런걸 보며 이야기했다. 그렇게 말하고 있으면 가끔 내가 혼자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자연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럼 해는 방긋 웃었다. 아니 방긋 웃는 게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가 느끼기에 방긋 웃는 듯한 빛을 내게 보냈다.
“넌 무얼 두려워하지?”
해의 질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난 잠시 생각하다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난 잊혀지는 게 두려워.”
“사람들이 널 잊는게?”
“아니. 그런 건 두렵지 않아. 그런건 이미 체념했어.”
난 폐를 돌고 나와 따뜻해진 담배 연기를 차가운 겨울바람에 희석시키며 말했다. 연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과 하나가 되어 메마른 대지를 달렸다.
“체념?”
“그래 체념. 날 기억하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 그리고 사랑들. 그들이 날 영원히 기억해 주길 바라진 않아. 내가 사라지고 그 후에 그들이 날 얼마나 기억해 줄까? 내가 죽음으로써 그들의 웃음을 1퍼센트라도 줄일 수 있을까? 그건 무리겠지. 날 위해 흘리는 눈물은 오래가지 않아. 그들은 곧 날 잊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꺼야. 그게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고 나 역시 그렇지.”
“그럼 무엇이 두려운 거야?”
“내가 잊는게…”
나는 다 타버린 담배의 시체를 발로 부비며 말을 이었다.
“내가 느끼는 수많은 추억, 기억, 무수한 생각의 파편들, 가슴 설레임,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내게 지엇던 작은 미소, 표정 하나 하나, 날 웃게 했던 웃음소리, 그들이 뱉었던 말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그런 걸 잊는다는 건 날 미치게 만들어.”
“그런 것들도 어차피 잊혀지고 무덤덤해 지는거 아냐?”
“그래 그게 두려운 거야. 그렇게 날 메우던 느낌들이 모두 무덤덤해 지는게.”
“그런 순간적인 감정을 품고 사는 게 더 괴로운거 아닌가?”
“순간적인 감정이 아냐. 가슴속의 감정의 찌꺼기에 집착하는 게 아니지. 그런 것과는 달라. 그 느낌들은 내 피를 타고 온몸을 돌아 심장을 데우고 머리 속에 고이는 거야. 그래서 그걸 꺼낼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을 베이거나 나도 모르게 웃음 짓게 하거나 아니면 노래라도 부르고 싶게 하지.”
“확실히 다른 것 같긴 하군.”
“그래서 순간적인 감정의 배설물을 예술이라 하지 않는 거야. 가슴속을 파고드는 감정을 거르고 다듬어 정서로 승화될 때 비로소 예술이 되는 거지. 아무리 강렬한 락도 표현주의 그림들도 뭔가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을 주며 순식간에 영혼을 감싸진 못해. 스폰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가슴을 적셔 나가지. 사람들이 충격이라 느끼는 것도 스미는 속도의 차이일 뿐이야.”
“그렇군. 그렇게 네 몸에 각인된 기억들은 이미 거르고 걸러 진거라 할 수 있겠군. 그런데 이성과의 사랑의 경우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면 이전의 기억은 무의미 해지는 거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언제나 이게 마지막 사랑이라고 믿는다는 게 문제지. 누군가와의 사랑이 뒤틀릴 때 마다 그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을 찾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에 한없이 슬퍼지지.”
“그래도 언제나 다른 사람을 찾아 왔잖아.”
“그렇긴 하지.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운명의 엇갈림 속에서 그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게 된게 얼마나 나에게 행운이었고 기적이었는지 생각해 보면 다시 그런 기적을 바란다는 게 부질없이 느껴지지.”
“다시 기억에 관해 얘기하자면 어긋난 사랑의 경우 오히려 기억을 지우려고 애를 쓰잖아.”
“내 몸에서 그 사람의 기억을 모두 털어 내려 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잊으려고 애쓰는 건 잊지 않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런 것들은 잊으려고 애쓸수록 뼈 속으로 파고 들지. 그냥 자연스럽게 무관심하게 그 상처를 버려두는게 차라리 빨리 잊혀지지. 하지만 상처가 더 이상 아프지 않을 땐 다시 그때의 가슴설레임이 그리워져. 그럴 땐 상처는 흉터가 되어 있는 거지. 흉터마저 사라져 갈때면 사랑하는 방법조차 잊은 듯해서 다시 슬퍼지지.”
“그렇게 정 기억을 붙잡고 싶다면 사진이라도 찍어두면 도움이 되지 않나?”
“난 사진은 그리 좋아하지 않아. 물론 사진이 기억을 부르는데 촉매의 역할을 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촉매일 수 밖에 없어. 그 자체로의 애틋함은 없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 사진속의 모습만이 떠오를 때가 있어. 그럼 정말 허탈해. 내가 원한 건 박제화 된 이차원의 추억이 아닌 배경의 따스함마저 느껴지는 삼차원의 추억이니까. 그래서 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기보다 순간적인 느낌을 주우려 하지. 그것도 잘 말리면 책갈피라도 쓸 수 있으니까. 그래도 가장 나은 건 글로 써 남기는 거 같아. 스무살의 내가 작가가 되고 싶은 건 떠내려가는 기억의 편린이라도 건져 적어 놓고 싶은 이유 때문이야.”
나는 말을 하고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이런…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났다. 시간은 일반적인 심부름의 시간을 이미 훨씬 지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해와의 대화를 이쯤에서 끝내야 했다.
“저… 이만 나 가봐야겠는데.”
“응 그래. 그런데 오늘 한 대화도 너에게 잊혀질까?”
“아마도.”
“아마도…”하며 해는 나의 말을 되씹었다.
“물론 너와 대화를 했다는 건 잊지 않겠지. 하지만 그게 언제였는지 또 무슨말을 했는지 이런건 곧 잊을꺼야. 아무리 생각해도 마치 없었던 일인양 기억은 날 배신하겠지.”
“생각날 때 다시 불러도 되지?”
“물론.”
“뭐 며칠후면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갈거구 한동안 못 보겠지만.”
“그렇겠지.”
“그래 그럼 이만. 오늘 즐거웠어.”
“나역시.”
그렇게 해서 나와 해와의 대화는 끝이 났다. 나는 그날 이후로 해가 다시 말을 걸기를 기대하기도 하고 해를 향해 뭐라 말해 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공허한 메아리었다. 지금 내 머리 위를 비추는 해는 나에게 마음을 열었던 그 해는 아닐꺼다. 그 짧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나에겐 스무해동안이나 익숙하게 바라보았던 해일 것이다. 정말 때로는 익숙한 누군가보다 낯선 모습에 더 친근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건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 낯선 설레임보다 더 차갑게 느껴질때가 있기 때문이다. 어쩔수 없는 일이다. 그때 나에게 말을 건 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을 마치고 태평양 가운데서 지금 날 비추는 해와 교대하겠지. 다음에 내가 미국에 갈 일이 생기면 꼭 그 해와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