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걷는것만으로도 흠뻠 젖어버리고 마는 폭우…
세찬 폭우속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게는 기원전이라 할수 있는.. 이어진 하나의 흐름이 되지 못하고
잘게 나뉘어 단편으로만 존재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
내 기억의 체계가 잡힌 잠실 이전에 나는 봉천동과 신림동을 전전하며 살았다
‘전전’이라는 표현을 쓰기엔 내 의지가 조금도 들어가지 못한
부모님의 가난이 우리가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게 했지만..
그래도 불행의 기억은 아니다
다만 잦은 이사로 기억이 조각나고 그 당시 친구의 이름하나 남기지 못했지만
그건 불행이 아니라 단지 유감이라고나 할까
내가 태어난 곳은 연희동이다
아주 어렸을 적에 살아서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지만
오랜 후에 모래네시장이란 말을 들었을때 낯설지 않았던 것은
그래도 조금은 내 어딘가에 흔적처럼 남아있었나 보다
우리 어머니가 그때 연세대로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가는 학생들을 보며
연대생이 이렇게 많은데 커서 이 안에 못들까 하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작은 기억이나마 떠올릴 수 있는건 봉천동과 신림동이다
집도 기억나고 어렸을적의 일도 떠오른다
그런데 살았던 집도 너무 많아서 어느 것이 먼저였는데 짜맟추지는 못한다
최초에 나를 이끈 기억은 언덕길이다
폭우로 인해 언덕길을 타고 미친듯이 흘러내리는 빗물의 강을 보자니
신림동 집 앞의 언덕길이 떠올랐다
그당시 인기티비프로인던 ‘한지붕 세가족’과는 다르지만 한집에 세집이
같이 살았는데 주인집은 자가용(그 당시엔 승용차가 아닌 자가용이었다)
까지 가지고 있는 부자집이었고 우리집과 다른 한집이 세를 들어 살았다
주인집엔 우리형보다 한살인가가 많은 형과 그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누나가 있었고 우리 말고 세들어 사는 집엔 혜정인가 하는 아주 어린
꼬마 여자애가 살았다
심심하면 혜정이네 집에도 놀러 갔는데 별로 할것도 없었던 것 같다
말동무가 되지도 못할 정도로 어린애였으니까 그냥 애기보는 기분으로
놀았던 거 같다
애틋한 로맨스는 전혀 기대도 못할 만큼 조그만 어린애였다고 적을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래봤자 나이차는 얼마 안 났던거 같다
내가 7살이라고 해도 한 3살이나 4살이었을 테니 지금은 대학다니겠다
그때도 비가 많이 내리면 집앞의 길로 빗물이 성나게 흘렀다
엄마 쓰레빠를 신고 일부러 발로 그 줄기를 자르고 서 있었던 기억도 있고
그 빗물이 흘러드는 하천에서 발을 담그고 놀았던 기억도 난다
지금은 아마도 복개되어 그 위로 도로가 생긴거 같은데
지저분한 물이라서 선생님들이 파상풍 걸린다고 협박을 했다
녹슨 못을 밟으면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잔뜩 겁을 줬지만
그 지저분한 물에라도 발을 뺄수 없던 없던 어린시절이다
아랫 골목에는 슈퍼가 있었다
그당시 어머니는 집에서 부업을 하셨는데 옆에서 100원만 하며 졸라서
100원을 받으면 그 슈퍼로 갔다
나는 우유부단하다..그리고 기회비용에 대한 아쉬움이 크고
그래서 늘 결정이 늦고 신중하다
가난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부자였다면 난 경솔했을것이다
100원을 가지고 슈퍼에 가면 한참동안을 골랐다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고 이걸 먹으면 후회할거 같고…
그래서 난 질보다 양을 추구했다
맛에 대한 측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내가 택한 방식은 계량화된
양을 보고 고르는 것이다
내가 주로 사먹던 건 ‘노을’이란 빵이다
아마도 내 기억엔 80g이었던 거 같은데 빵중에서 최고의 질량을
자랑하는 큰 빵에 위에 소보루가 조금 얹어져 있었다
위 골목엔 친구가 살았다
이름도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지만 그래도 꽤 친했었다
예의바른 아이라서 우리 부모님도 좋아했다
나역시 예의바른 아이라 친구의 부모님 역시 날 좋아했다
뭐하고 놀았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아마도 계몽주의에서 야기된 프랑스혁명 이후 발생한 낙관적 공리주의에
대한 회의가 후기 인상주의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같은 어린시절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는 아주 쉬운 주제로 이야기를 하며 놀았을 것이다
언덕 너머엔 시장이 있었다
엄마랑 같이 시장에 자주 갔었는데 김장을 앞둔 늦가을
엄마는 징징거리는 나를 그냥 두고 배추만 들고 집에 오셨다
그날 내가 집에 와서 소리쳤던 ‘엄마, 내가 중요해요 배추가 중요해요’
는 아직도 어른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골목은 골목으로 이어지고 언덕 너머엔 다른 언덕이 있듯
작은 기억으로부터 이어진 기억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끊임없이 불러온다
끝없는 길에서도 어딘가에선 쉬어야 하듯
오늘은 여기까지만…